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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오면 4·19 혁명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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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권 / 전 남양주 오남중학교 교장
기사입력 2020-04-02 [06:53]

[김기권 칼럼] 오는 19일이면 4.19대혁명 발발 60주년이 된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환갑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해마다 벚꽃, 라일락향기 가득한 이때가 되면 나는 수유리 4.19묘지를 찾아 먼저 간 동지들 영령들을 위해 참배를 한다. 

▲ 김기권 회장.     ©성남일보

1960년 내 나이 19세 때 문학에 심취해 당시 우리나라 국문학 태두이신 양주동 박사와 시인 서정주님께서 봉직하시고 임의 침묵의 저자 한용운님의 모교 동국대에 입학하게 된다. 

 

충남 금산 깡촌에서 자라 난생 처음 전차와 택시를 타보고 휴일이면 서울 근교 북한산 백운대와 관악산 도봉산 수락산등 등산에 열을 올리고 나니  1년 세월이 한 순간에 지나갔다.  

 

당시 2학년인 4월 19일 아침, 막 수업이 본관 석조전 2층 강의실에서 시작될 무렵 한 학생이 앞문으로 들어와 교수님께 정중히 인사하고 우리를 향해 일장 연설을 했다. 

 

내용은 어제 고려대 학생들이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후 귀가 중 많은 학생들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상해를 입었으니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너나없이 책가방을 들고 정문을 나가니 이미 선두 학생들은 을지로 4가에서 시청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을지로 가득 열을 지어 빠른 걸음으로 전진 할 때 길가에 많은 시민들이 박수와 환호로 우리의 사기는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시청광장에 도착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연단에서는 한 학생이 마이크로 3.15부정선거를 성토하고 있을 때 내 옆에 있든 한 학생이 큰 소리로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도 효과 없으니 경무대로 가자. 외치니 많은 학생들이 와하고 경무대 쪽으로 행진하게 되었다. 

 

나는 졸지에 선두 대열이 되고 행진의 맨 앞에서 주도적으로  경무대를 향해 스크럼을 짜고 열을 지어 질서정연 종종걸음으로 광화문을 두고 왼쪽으로 돌아 해무청에 도착하니 수많은 경찰들이 모자테를 턱 아래에 메고 최루탄을 수없이 쏘고 소방차가 물을 뿌려대니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 죽 앉아있었다. 

 

마침 그 때 경무대와 경찰 사이에 동국대 프랭카드를 든 학생들이 우리를 보고 어서 오라는 신호와 함께 도로 옆에 수도관공사를 위해 산처럼 모아둔  자갈을 던지고  수도관을 밀면서 앞으로 전진 할 때 많은 시민들이 양동이 세수 대야에 물을 떠와 우리들에게 주었고 우리는 얼굴이 화끈 거리고 눈물 콧물 쉴 새 없이 흘러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경무대 바로 코앞 효자동 전차종점에 다달 했을 때  철조망이 가로 쳐져 있었고 그 뒤에는 수많은 경찰과 군인작업모에 별 하나 단 군인이 우리들에게 해산을 종용했으나 우리는 막무가내로 철조망을 가방으로 밀어내니 별안간 총소리가 사방에서 콩 튀듯 나고 옆에 학생들이 마구 쓰러지는 화급한 지경에 나는 도로 옆 가게로 숨어들었다. 

 

내 뒤를 따라 몇몇 학생과 소방차운전수도 들어와 와들와들 덜고 있을 때 경찰이 총을 들이대고 어서 나오라는 명령에 따라 맨 앞에 내가 가게문을 나서자 경찰이 총개머리로 나의 가슴을 치니 나는 억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고 잠시 후에 학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로에 나오니 학생들이 줄줄이 머리에 손을 대고 앉아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는 경복궁 후문으로 이동되어 들어가니 그곳에는 이미 3.4백명으로 추산되는 학생들이 머리에 손을 대고 열을 지어 죽 앉아있었다. 

 

잠시 후 군 트럭 여러 대가 들어와 내 옆에 주차했는데 차바퀴 밑으로 쉴 사이 없이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경무대 앞 희생자들로 기억된다. 그날 그 때 경무대 앞에서 희생된 학생들은 사망 21명 부상자 17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4.19혁명 전체 전국적으로 보면 186명이 사망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갑자기 싸이렌 소리가 길게 울리어 계엄령이 발동되고 조금 있으니 총소리 고함소리 요란하던 서울 시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해질 무렵, 저녁때쯤 우리는 몇 대의 군 트럭에 실렸다. 

 

한 참을 달리고  내리고 보니 마포형무소였다. 모두 허리띠를 압수당하고 몇몇이 한 조가 되어 입실 했는데 기존에 있던 죄수들이 급하게 이동되었는지 감방 안이 어수선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3일간 수용되었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풀려났다. 

 

석방되어 중구초동에 소재한 학교기숙사에 돌아오니 많은 사생들이 행방불명된 나를 찾아 병원마다 돌아다녔다는 말을 듣고 지금도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동문 노희두군이 당일 경무대 앞에서 희생되어 시립동부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동문 이선동군과 을지로를 따라 동부병원에 걸어서 가는데 도로 옆 파출소가 불에 타 검게 변한 것을 보고 얼마나 시위가 격렬했는지 짐작이 갔다. 

 

노희두군은 시체해부대위에 반듯하게 하늘을 보고 누어있는데 눈을 뜨고 있었고 왼쪽 가슴중앙에 혈흔이 현명하게 남아있었다. 문을 열고 나오니 노희두군 고등학생 동생이 울고 있었다. 

 

그는 뒤에 형이 못 이룬 청운의 뜻을 동국대에 들어와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 성공했다하니 지금도 인연이 있어 만나보면 좋겠다. 

 

노희두군의 흉상이 동국대 4.19동산에 기념비와 함께 서있어 우리공로자회40여명은 해마다  4.19일이면 그곳을 찾아 명복을 빈다. 

 

4.19대혁명은 세계사적 의미로 보면 미국독립전쟁, 프랑스대혁명, 영국명예혁명과 함께  세계 4대민주화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할 가치가 양적 질적 자격이 충분하고 대단하다.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민주. 정의 등 숭고한 정신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홍보가 현재 살아있는 동지들의 의무가 되고 또한 우리 국민전체에도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북한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1인 독재 정치로 수많은 세계인들이 탄압받고 신음하는 곳에 파고 들어가 해방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새마을 운동이 동남아로 전파되어 많은 공적을 쌓고 있는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  

 

사실 4.19혁명은 역대 정권의 푸대접 속에 방치되어 국민들 망각 속에 깊이 잠들어 있고

4.19혁명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며 자기비하의 꿈에서 이제 깨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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